태국 여행 120일 동안 고수는 입에도 대지 못했다.
약 십 년 전. 태국에서 120일의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니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유학생이나 주재원도 아니면서 겨우 여행을 하고 온 것뿐인데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니 무슨 말일까?
오토바이를 빌려 태국의 서른여 곳 지역을 여행했는데 대도시와 오지마을 그리고 산과 바다를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둘러봤다. 이따금 좋은 호텔에서 머물기도 했고, 때로는 캠핑을 하며 밤을 보냈다.
여행자로서 태국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경험한 셈인데 그럼에도 팍치(고수)는 적응하기 어려워 늘 "마이 싸이 팍치(고수 빼주세요)"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심지어 일반 식당도 아닌 여행 중 친해진 태국인 친구의 고향집에 초대받을 때도 마이 싸이 팍치를 외쳤다. 오죽하면 어르신께서 차려주신 고마운 식사에 고수를 빼달라고 내 취향을 밝혔을까?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을뿐더러 무례한 행동이라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음식"을 묻는다면 "개고기와 닭발 빼고 다 먹어요"라고 답을 하는 건 나의 단골 레퍼토리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고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연애할 때는 여자친구를 맛집에 안내하길 좋아하면서도 정작 나는 김밥 한 줄이면 충분하다며 가성비 좋은 남자라고 장난치길 즐기는 수준이다.
개고기와 닭발을 먹지 못하고 이제는 그 목록에 고수를 포함해야 할까? 생각이 들 무렵 내게 큰 변화가 생긴 일이 펼쳐지는데,
멕시코가 큰일 했네
긴 여행을 마치고 서울 생활의 적응을 위해 시간을 보낼 무렵 문득 이태원에 갈 일이 생겼다. 이태원은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찾아 친숙한 곳으로, 이태원은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일 끼친 동네다.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접할 수 있는 곳으로 낯선 음식에 대한 거리감을 낮춰 호기심을 키우며 나아가 여행을 향한 욕구로 이어진 계기를 준 곳이다.
이 날은 멕시코 음식 전문점에 들어가 대표 메뉴인 타코를 주문해 먹었다. 그런데 타코의 재료 중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굉장히 익숙한 어떤 맛이 느껴지는 것이다. 타코는 고기와 채고 그리고 소스가 전부로 재료가 특이할 건 없다. 콜라와 겻들이면 좋고 다만 먹는 내내 자꾸 음식물을 흘리는 게 약간 귀찮을 뿐이다. 어쨌든 재료 중 어느 한 가지 맛이 너무나도 익숙해 내용물을 몇 번이고 훑어봤나 모른다.
범인은(?) 찾지 못하지만 익숙한 맛이 싫은게 아니었다. 너무나 상큼하고 맛있었다. 타코에는 라임즙도 들어가지만 라임과는 다르다. 내가 자꾸 추적하는 그 맛과 향 때문에 이 음식이 신선하다고까지 느껴졌다.
잘게 다져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내 미각을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한 식재료는 다름 아닌 내가 그토록 싫어한 고수였다. 뭐랄까, 그야말로 원효대사 해골물이 따로 없다. 타코의 주재료 중 하나가 고수였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분명 빼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체를 모르고 접한 나는 "내가 원래 고수를 먹었었나?" 싶을 정도로 내 스스로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몇달 후 나는 태국을 다시 방문했다.
이제는 고수를 고수처럼 잘 먹어요.
이태원에서 경험한 멕시코 음식 전문점의 고수와 태국의 고수는 다를 수 있고, 타코의 다른 재료가 고수의 강한 맛을 중화시킨 이유도 있을 테니 자만하지(?) 않고 도도히 태국 음식을 맞이하려 했다. 호텔 앞 노점에서 국수를 주문했고 이번에는 '마이 싸이 팍치'를 말하지 않았다.
국수 위에 흩날린 고수. 오른 손에는 젓가락, 왼손에는 숟가락을 쥔다. 그리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고수'라고 말할 그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음식을 보면,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마늘은 거의 대부분의 음식에 필수 재료로 들어가듯 고수도 그 역할이었던 셈이다.
고수 특유의 향과 맛이 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뭐랄까, 라면에 파를 몇줌 썰어 넣는다고 파의 맛과 향이 강하게 스미지 않는 것처럼 고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고수는 입술에 닿는 것도 싫어한 내가 맞는가. 120일 동안 여행을 하며 느끼지 못한 경험을 멕시코 타코를 계기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 후 태국 음식이 다르게 보였다. 돌이켜 보면 고수 하나 때문에 포기한 음식이 얼마나 많았던가. 전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태국 음식이라 단언한 유명인사들의 평가도 있는데, 이렇듯 음식으로 유명한 나라를 여행하며 단 하나의 식재료로 많은 경험을 놓친 건 아니었을까? 변한 내 모습을 보고 태국 친구들이 신기하게 쳐다본 일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친구의 어머니 앞에서 더는 '마이 싸이 팍치'의 무례함도 사라졌다.
코로나 시국을 제외하면 거의 매년 방문하는 태국, 주재원으로 파견을 나가야 했던 베트남, 그리고 출장으로 자주 찾던 중국까지. 고수가 주요 식재료인 국가를 방문할 때도 이제는 고수를 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과거에 느낀 이질감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저 원래 있던 그 모습대로 보일 뿐.
최초 고수를 먹으며 느낀 첫경험에 나도 모르게 큰 편견에 사로 잡힌 건 아닌가 모르겠다. 하긴 덧붙여 말하면 태국의 게이와 레이디보이가 처음에는 그리 낯설게 보였는데 지금은 "저 사람은 게이다"라는 생각 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일상처럼 느끼지 않는가.
글을 마무리 하며 생각하니, 멕시코가 큰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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