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5도
조식을 먹고 날씨 어플을 보니 오늘은 영하 25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별로 겁이 나지 않는다. 핀란드부터 시작해 에스토니아를 여행하며 그새 날씨에 적응했다고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날씨를 보니 올드타운을 벗어나 탈린 외각으로 가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조금 더 자연과 가까운 곳에 욕구가 생긴 것이다. 물론 추운 건 싫지만 나는 이것도 경험이라 생각한다. 언제 북유럽의 겨울을 맞아 보겠어?
구글맵을 물끄러미 보다가 피카카리 해변을 발견하고 오늘은 이곳을 여행하기로 한다.
피카카리 해변
에스토니아 탈린의 북부에 위치한 피카카리 해변(Pikakari beach)은 여름에 탈린 시민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해수욕장이라고 한다. 휴식을 위한 시설과 인명 구조원도 근무한다고 한다. 특히 지나가는 여객선이 만든 파도가 인기가 많다는데, 나는 이곳을 한 겨울에 가는 것이다.
지도를 보니 호텔 근처에서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 또한 버스의 종점이 피카카리 해변이라 구글맵을 보며 경로를 쫓지 않아도 된다. 버스 정류장 앞 편의점에서 교통카드를 사고 인증샷을 찍었다. 알고 보니 탈린 시민은 모든 대중교통이 무료라고. 에스토니아는 작지만 분명 대단한 나라인 게 틀림없다.
생각해 보면 유럽 땅에서 처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셈인데, 핀란드 헬싱키는 작은 도시라 도보로 여러 명소를 둘러보기에 무리가 없어 트램이나 버스를 이용할 일이 없었다. 대중교통은 에스토니아에 와서 첫 경험을 하는 것이다. 버스는 서울의 버스와 크게 다르진 않고 느긋하게 창밖 풍경을 구경하며 이동했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삼림, 에스토니아에서 겨울 트레킹
피카카리 해변에 도착하니 황량하다. 겨울 바다에 무얼 기대한 건가. 그저 쓸쓸하고 고독한 분위기만 있을 뿐이다. 여름에는 운영했을 시설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지만 지금은 식당도 매점도 아무것도 없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독서'라고 이름을 붙인 플레이 리스트를 들으며 걷기 시작했다.
에스토니아는 산이 없는 나라다. 하지만 숲이 많고 공기질은 유럽에서 두번째로 좋다고 알려졌다. 에스토니아인은 자연과 야생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그들만의 라이프 스타일에 자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왜냐하면 도시 어디를 가든 이것과 관련한 홍보물을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래사장에서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숲이 나온다. 발트해에서 불어 오는 강한 겨울바람과 숲 사이로 스민 바람을 고루 맞으며 "추운데 괜히 왔나"싶으면서도 몸의 면역체계 개선에 의미를 두며 천천히 걸었다.
중간에 인기척이 느껴 바다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수영복 차림의 여성이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 나는 롱패딩도 부족해 안에는 몇 겹의 옷을 입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내가 지금 무얼 보고 있나 싶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에스토니아인에게 겨울 수영은 인기가 높다고 한다. 겨울수영 센터도 운영하고 커뮤니티도 활발하다는데 이점을 들어 나중에 호텔 직원에게 "너희는 추위 안 타니?" 물어보니 본인들도 추위를 많이 탄다고. 아마도 혹독한(?) 환경이 이들을 강하게 만든 모양이다.
걷는 내내 영화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자꾸 떠올랐다. 이 영화의 명장면인 엔딩씬과 이곳의 해변의 분위기가 매우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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